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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농사에 마늘화폐 만든 대만의 괴짜 슈리칭의 구겐하임 점령기

2024-05-08

[arte] 이한빛의 아메리칸 아트 살롱

제2회 LG 구겐하임 어워드 수상자 슈리칭(Shu Lea Cheang)의 작품세계


올해 초, LG와 구겐하임 미술관은 두 번째 ‘LG 구겐하임 어워드’ 수상자를 발표했습니다. 글로벌 기업과 유수 미술관이 기술을 바탕으로 혁신적인 예술 활동을 펼치는 작가들을 발굴, 지원하기 위한 상인 만큼 관심이 집중됐습니다. 특히, 지난해 제1회 수상자로 타임지가 선정한 ‘100대 AI 인플루언서’인 스테파니 딘킨스(Stephanie Dinkins)가 호명됐던 만큼 뒤를 이을 작가가 누구인지 궁금증이 커진 상황이었습니다. 또 다른 AI 작가가 아닐까 했던 예상을 뒤엎고 이번엔 70세의 노익장이 선정됐습니다. 바로 대만계 미국 작가인 슈리칭(Shu Lea Cheang·70)입니다.

슈리칭은 1990년대부터 인터넷 공간에서 디지털 예술을 실험한 이른바 넷 아트(Net Art)의 ‘시조새’로 꼽힙니다. ‘기술은 예술의 도구’라는 그는 VR, 소프트웨어디자인, 코딩과 같은 최신기술을 자신의 작품에 적극 활용합니다. 그러나 그가 읽어내는 것은 이같은 화려한 기술의 향연이 아니죠. 현실세계와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는 가상세계에서, 인간 사회의 폭력적인 면에 초점을 맞춥니다. ‘익명’이라는 가면 아래 너무 손쉽게 자행되는 극단적인 성차별과 인종주의를 가감 없이 드러냅니다.

문제의식은 선명하지만, 작품은 복잡하고 난해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수상 소식이 전해진 이후 작가는 지난 2일 '관객과의 대화'에 나섰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대. 사실 나도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알려고 노력하는 중이야(하하)”
 

첫 번째 키워드 : Hacking tactics

슈리칭 하면 ‘브랜든’(1998-1999)을 대표작으로 꼽습니다. 구겐하임 미술관이 커미션 한 인터넷 초창기 시절의 웹 아트로, 미술관의 영구소장품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브랜든은 1993년 미국 네브래스카에서 트랜스젠더 남성인 ‘브랜든 티나’가, 원래 여성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 성폭행당하고 그 뒤로부터 일주일 만에 살해당한 사건을 바탕으로 1년 동안 온라인상에서 벌어진 토론을 수집한 작업입니다. 이 토론을 직접 보려면 꽤나 공을 들여야 합니다. 디지털 네이티브조차 길을 잃을 정도니까요. 1990년대풍의 썸네일이 가득한 내비게이션 바 이곳저곳을 눌러야, 작가의 작업을 만날 수 있습니다. 롤플레잉 게임의 갈래 길과 숨은 퀘스트처럼, 작품을 읽어내기 위해선 여러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마치 ‘해킹’하듯 돌아다니다 보면 다양한 스크립트와 이미지를 만나게 됩니다. 브랜든 외에도 비슷한 사건들이 로스쿨 학생들의 케이스 스터디 자료처럼 정리되어 있죠. 성폭행 과정을 자세하게 묘사하라는 경찰, 피해자의 항의에 “그저 조사하는 일반적 절차”라는 답변 등 업로드된 자료들이 너무나 적나라해, 지금에도 읽기 버거울 정도입니다.

원래 고안된 쓰임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쓸 수 있도록 조작하는 ‘해킹’은 작가가 말하는 자신의 첫 번째 키워드입니다. 2019년 베니스 비엔날레 대만관에서 선보인 ‘3X3X6’은 각 전시장에 설치된 6개의 카메라가 끊임없이 모니터링하는 3평방미터의 감옥을 은유합니다. 외부를 찍어 내부자에게 보여주는 카메라가, 내부자를 찍어 외부에 보여주는 역할로 바뀌었죠. 관람객은 자신을 감시하는 카메라가 보내는 영상과 함께, 성적 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감금당했던 10명의 영상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슈리칭은 “물리적 감금도 있지만, 우리는 지금 소셜미디어나 CCTV 같은 것들에 둘러싸여 항상 감시당하고 있지 않나. 사회 전체가 디지털 파놉티콘(Panopticon)이다”고 설명합니다.

 

두 번째 키워드 : Virus becoming

슈리칭은 영화제작자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근작인 'UKI'(2023)은 코로나19로 전세계가 멈췄던 기간, 작가가 고민했던 테마들이 녹아있습니다. 바이러스로 인한 질병이 퍼졌을 때 이를 다루는 국가권력의 작동방식, 사회 통제를 비롯 바이러스 그 자체에 대한 궁금증과 인간 신체의 경계를 벗어나는 ‘바이오 공학’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UKI 시나리오는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 썼다. 나는 1980년대와 90년대를 뉴욕에서 보냈다. AIDS에 대한 공포와 그것을 다루는 국가의 방식은 SARS와 코로나19와 다르지만, 또 같은 부분도 있다. 정치적으로 이용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정부는 감염을 추적한다는 명목으로 개인의 일상을 통제하고, 제한하고, 감시했다”

영화 UKI에서는 현실의 감시와 통제가 더 극대화한 세계가 펼쳐집니다. 그 세계엔 성적 쾌락을 상품화하고, 인류를 착취하기 위해 유전자 조작과 데이터 수집을 자행하는 생명공학 회사 제놈(GENOM)과 이에 대항하는 폐기된 휴머노이드 ‘레이코’가 등장합니다. 흥미진진한 공상과학 영화이나, 마냥 ‘상상력이 대단하다’고 추켜세우기엔 목 뒷덜미가 서늘한 느낌이 듭니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부조리가 동시대의 모습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죠.

 

세 번째 키워드 : Geek farming

슈리칭의 주요 관심사는 중 하나는 농업입니다. 공상과학과 디지털세계를 천착하는 동시에 실물 세계를 탐험하는 극단을 오갑니다. 스스로 ‘괴짜 농사’라고 부르는 프로젝트는 땅에 무엇인가를 심고 길러내는 것에 대한 경외와 이 같은 방식으로 이미 우리가 망쳐놓은 것들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작가는 실제로 2000년경에 마늘 농사를 지었습니다. 지인이 ‘마늘 한 알을 심으면 6알이 열린다’는 설명에 수익률 600%라며 뛰어든 것이죠. 원하던 대로 마늘을 수확하자, 이를 트럭에 싣고 ‘와이파이 공유 운동’에 나섭니다. “마늘을 먹으면 다 먹고 나서도 입에서 냄새가 나서 마늘 먹은 걸 사람들이 알잖아.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와이파이를 꼭꼭 숨기지 말고 개방해달라고 유명 기관들을 다니며 설득했지” 마늘과 와이파이 공유 운동의 기이한 동거는 이같은 시적 상상력에서 출발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마늘 화폐도 찍어냈죠. 요즘으로 치면 ‘마늘 코인’을 만든 것입니다.

이처럼 슈리칭의 작품세계는 바이러스와 같은 초미세 단위에서 글로벌 사회라는 거대까지, 농사라는 실물세계에서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사이버 공간까지 종횡무진합니다. 아시아 여성으로 미국과 프랑스라는 서구사회에서 소수자이자 경계인으로 살았던 경험은 일반인이 생각지 못하는 독특한 시각을 제안합니다.

 

LG 구겐하임 어워드는
이러한 슈리칭이 LG 구겐하임 어워드의 두 번째 수상자가 된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상의 취지와 너무나 부합하는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LG와 구겐하임은 “예술과 기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시대와 호흡하며 혁신적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예술가들을 위한 것이며, 사회상을 반영하는 중요한 가치를 함께 연구함으로써 예술을 구현하는 새로운 방식을 모색한다”고 밝혔습니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슈리칭 선정 이유에 대해 “특정 기술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기술을 활용해 예술적 실험을 펼치며, 디지털시대 스토리텔링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며 그의 선구자적 면모를 높이 샀습니다. LG도 “심사단이 주목한 선구자 정신과 부단한 실험정신이 LG가 이 상을 통해 글로벌 고객과 공유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가치”라고 설명합니다. 글로벌 대기업들의 미술관 지원이 트렌드가 된 지금, 아트 마케팅을 넘어선 아트 패트론이자 동반자로서 1인치가 다른 LG의 행보가 더욱 기대됩니다.